예술은 표현 형식의 일종으로서, 특히 인간의 감정이나 미적 감각에 호소함으로써 논리적·이성적 설득과는 다른 차원의 섬세함과 강렬함으로 관념이나 사상을 전달하려는 인간의 특별한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을 중심으로 삼는 세계를 우리는 특별히 ‘예술계’라고 일컬으면서, 우리의 삶과 죽음을 위한 예술계 인사들의 능력을 동경하거나 그들의 헌신에 동참함으로써 예술계 일부가 되기를 갈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표현의 자유와 평등에 관한 최근 예술계의 이해와 태도는 예술과 예술계를 향한 우리들의 동경이나 동참을 방해·저해할 만큼 낯설고 실망스럽다.
혐오를 혐오하고, 혐오 표현을 증오하더라도
지난달 혐오 표현 방지와 청소년 보호를 내세우며 국회의원 김현이 대표 발의한 두 법률안(‘「음악산업진흥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과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이, 논란 끝에 철회되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예술계를 중심으로 한 반대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문화예술노동연대는 해당 법률안을 “혐오 대응을 명분으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고 문화예술 노동자의 창작을 위축시키는 법안”으로 규정하고, “혐오에 대응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검열의 부활이 아니라 20년 넘게 제정이 미뤄진 포괄적 차별금지법”이라는 성명을 내놓았다. 미디어기독연대, 문화연대, 블랙리스트 이후, 오리집, 표현의자유와언론탄압공동대책위원회, 프로젝트 통, 한국작가회의, 흥우주사회적협동조합, 마을예술네트워크 등도 "청소년 보호를 명분으로 한 ‘대중문화 사전검열 개정안’을 즉각 철회하라”라고 하면서, “혐오 표현에 대한 실효성 있는 대응”으로 “정부와 국회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음악평론가 서정민갑은 “유해·혐오 표현 규제 법안을 만들지 말자는 이야기는 아니다”라면서 “국회의원들이 이번 개정안을 철회하고 헤이트스피치 금지법과 차별금지법을 만드는 일을 차근차근 밟아가기를 요청한다”라는 논평을 언론에 기고했다. 물론 창작과 표현을 억압·위축시킬 수 있는 법률안의 발의에 대한 예술계의 규탄과 철회 요구는 마땅하고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를 금과옥조처럼 삼고 다양성을 존중·옹호해야 할 예술계에서 혐오 표현에 대한 규제를 응원하고 그 해법으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내세운 것은, 예술 문외한인 헌법학자로서는 이해하기 어렵고 괴이하기까지 하다.
혐오(嫌惡)는 ‘싫어하고 미워함’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예술계 즉 창작과 표현의 자유에 기대어 노동하거나 그 산물을 오관(五官: 目·耳·鼻·舌·皮)으로 맞이하며 칠정(七情: 喜·怒·哀·樂·愛·惡·欲)을 경험하려는 사람들의 세계에서만큼은, ‘어떤 대상에 대해서 싫어하고 미워하는 표현 또한 억압 없이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목소리도 우렁차야 하지 않는가? 오히려 대중으로부터 눈총과 억압을 받더라도 ‘누가’ ‘어떤 기준’에서 특정 표현을 혐오 표현으로 낙인찍는지를 되물으며, 낙인 행위와 낙인 생산자에 맞서는 불온함을 예술계의 용기로 추앙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실제로 ‘음란’, ‘저속’, ‘친북’ 등과 같은 딱지를 붙여가며 표현을 억압해 온 대중과 권력에 맞선 불온함이 창작과 예술을 지탱해 온 자유의 원동력 아니었던가? 그래서 귀스타브 쿠르베의 그림 <세상의 기원>도, 마광수의 소설 <즐거운 사라>도, 정태춘의 노래 <아, 대한민국...>도, 김수영의 시 <김일성 만세>도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 아닌가?
그렇다면 ‘혐오’나 ‘차별’과 같은 언어 또한 창작과 표현을 억압하는 새로운 딱지일 수 있음을 예술계가 가장 먼저 앞장서서 예민하게 경계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설사 혐오를 혐오하고 혐오 표현을 증오하더라도 이를 외면하거나 권력에 기댄 법으로 탄압하려 들 것이 아니라, 혐오와 혐오 표현에 맞설 대항 표현을 창작해 내고 이를 넓고 깊게 퍼뜨리는 실력이 예술계의 전문성으로 자리매김하도록 애써야 하는 것 아닌가? 심지어 아직 언어를 갖지 못한 증오심과 은폐된 혐오들까지도 공연히 현현시켜 이를 살피고 성찰하는 심성 구조를 형성하는 데 예술계의 역할이 있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적어도 예술계에서만큼은 각종 혐오와 이를 확대·재생산하려는 욕망을 박멸의 대상으로 치부하기보다는, 한편으로는 혐오를 표현하려는 예술의 원천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혐오에 맞서려는 예술의 존재근거로 삼고 이를 존중해야 할 일 아닌가? 백번 양보해서 특정 혐오 표현이 표현에 그치지 않고 타자에게 실질적 피해를 끼치거나 공동체에 심각한 해악을 초래할 가능성이 경험적 인과법칙에 따라 너무나 명백하고 급박하더라도, 혐오 표현에 대한 대응을 운운하며 ‘포괄적 차별금지법’과 같은 새로운 통제 수단 마련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보다는, 이미 우리가 합의한 민·형사적 수단들(예컨대 모욕죄, 명예훼손죄,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 등등)을 통해서 혐오 표현에 따른 해악과 피해를 구체적·개별적으로 응징·전보하는 방법을 먼저 살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어쩌면 어떤 대상에 대한 혐오 표현을 금지하고 오직 좋아하고 사랑하는 표현만을 공공연하고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유도·조장하는 것으로부터, 해당 대상에 대한 경멸·미움·싫음을 표현하거나 이를 경험·공감·성찰하려는 사람에 대한 차별과 억압 및 혐오가 싹트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차별금지법으로 혐오 표현을 막는 것은, 차별금지법으로 차별을 자행하며 혐오의 재생산에 동참하는 것 아닌가? 혐오 표현에 대한 예술계의 최근 태도는 예술 문외한인 필자가 보기에도 전혀 예술적이지 않아 보인다.
더군다나 예술계가 혐오 표현에 대한 실효성 있는 규제·대응책으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한 것은, 사회 일각에서 행해온 소위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에 어설프고 성급하게 부화뇌동한 결과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에 힘입어 발의되었던 여러 차별금지법안에 내포된 위헌성 및 차별성에 대한 헌법학계의 우려를 재론하면서 해당 법률안의 본질은 ‘차별금지법안’이 아니라 ‘차별법안’에 가깝다는 점을 여기서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부화뇌동이 아니라면 또 ‘차별금지법’이라고 쓰고 ‘혐오표현금지법’으로 읽고자 한 것이 아니라면, 예술계는 과연 어떤 근거와 이유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혐오 표현에 대한 실효적 대응책이 된다고 판단한 것인지, 나아가 혐오 표현에 대한 실효적 대응책으로 내세운 ‘포괄적 차별금지법’으로는 예술을 위한 창작과 표현의 자유가 침해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포괄적 차별금지법’과 같은 거룩한 이름의 법률로는 애당초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없다고 믿는 것인지를 묻고 싶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공개적으로 촉구한 예술계의 목소리는, 정말로 포괄적 차별금지를 내세우면서 등장한 법률안들의 구체적 내용을 면밀하게 점검한 후 표현·예술의 자유와 차별금지 간의 충돌 및 긴장 관계를 예민하게 성찰한 결과인가? 아니면 혐오를 혐오하고 혐오 표현을 증오해야 할 것 같아서 또 그러한 분위기에 편승해야만 할 것 같아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거론한 견강부회에 불과한 것인가?
‘차별금지’와 ‘평등명령’에 내포되고 중첩된 이중의 모순
차별을 금지한다는 것은, 평등을 명령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차별금지’도 ‘평등명령’도 모든 상황에서 모든 대상을 똑같이 취급할 것(절대적 무차별·평등)을 요청하는 것은 아니다. ‘차별금지’도 ‘평등명령’도 비교 대상 상호 간 존재하는 차이를 인정·구별하는 전제에 기초하고 있다. 변화무쌍한 시공간 속에서 존재자들 상호 간 모든 표지가 일치하는 경우는 논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모든 사람을 어떤 경우에도 똑같이 대우하는 것은 애당초 가능하지 않으며, 설령 가능하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모든 사람을 균일화·동일화하는 것인바 오히려 차별금지를 통해서 도모하고자 한 목적적 가치인 인간의 존엄을 위협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평등은 특정한 비교 상황에서 비교 대상 상호 간 ‘다른 특성은 다르게, 같은 특성은 같게 취급(異異同同 취급)’해서 형식적·기회적 차원의 상대적 정의로움(기회의 평등 혹은 법 적용에서의 평등)을 구축함과 동시에, 비교 대상 상호 간 ‘같은 특성은 같게, 다른 특성은 다르게 실현(同同異異 실현)’되는 실질적·결과적 차원의 상대적 정의로움(결과의 평등 혹은 법 내용상의 평등)을 추구하는 규준이라고 할 수 있다. 헌법재판소 또한 “헌법 제11조 제1항의 평등의 원칙은 … 절대적 평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 상대적 평등을 뜻”하며 “우리 헌법이 선언하고 있는 ‘인간의 존엄성’과 ‘법 앞에 평등’(헌법 제10조, 제11조 제1항)이란 … 법 적용상의 평등을 뜻하는 것 외에도 … 법 내용상의 평등을 의미하고” 있음을 명시적으로 거듭 확인한 바 있다.*
* 헌재 1994. 2. 24. 92헌바43, 판례집 6-1, 75쪽; 헌재 1992. 4. 28. 90헌바24, 판례집 4, 231-232쪽; 1995. 10. 26. 92헌바45, 판례집 7-2, 408쪽 참조.
실제로 평등은 ‘기본권 주체 상호 간 같은 특성에 주목해서 동등대우를 요청할 수 있는 근거이면서 동시에 다른 특성에 주목해서 차등대우를 요청할 수 있는 근거’로서, 그리고 ‘기회의 평등에 입각하면서도 동시에 결과의 평등을 담보해야 할 규준’으로 원용된다. 특히 ‘동등대우의 근거로서의 평등’은 비교 대상 상호 간 같은 특성(공통성)을 기반으로 공동체의 통일성·보편성을 형성하고 공감대를 나르는 수레의 역할을, 그리고 ‘차등대우의 근거로서의 평등’은 비교 대상 상호 간 다른 특성(상이성)을 기반으로 공동체의 다양성·다원성을 이끄는 수레의 역할을 각각 수행하며, ‘기회의 평등’은 자유와 권리를 능력껏 확보 및 발산할 수 있는 형식적 계기 구축을 그리고 ‘결과의 평등’은 자유와 권리를 실질적으로 누릴 수 있는 기본조건을 마련·보강하는 계기 구축을 각각 겨냥하고 있다. 따라서 차별 혹은 평등 문제에 있어서는 ‘차별금지’ 혹은 ‘평등명령’에 내포된 중첩된 이중의 모순─즉 ‘동등대우의 근거이면서 동시에 차등대우의 근거라는 내적 모순’과 ‘형식적·기회적 보장의 근거이면서 동시에 실질적·결과적 보장의 근거라는 내적 모순’─을 어떻게 조정·조화할 것인지가, 현실적·실천적 과제가 된다.
주관적 권리로 소진된 평등과 우리의 현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평등에 대한 외침만 난무할 뿐 우리의 실제적 삶은 평등의 상실을 향해 퇴보하고 있는 것 아닐까? 특히 비교 대상 간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를 섬세하게 분별하기 위한 기준으로서의 평등에 주목하기보다는 평등을 성급하게 자신의 권리로 내세우는 데 급급한 결과, ‘동등대우 근거로서의 평등’은 타자의 행복으로부터 자신의 불행을 찾아내어 타자와 동등한 행복을 갈구하는 타자 의존적 매개로 탈바꿈했고, ‘차등대우 근거로서의 평등’은 타자의 실패에 자신의 성공을 기생시키면서도 타자와 구별되는 자신의 형편이나 특성을 앞세워 자신의 성공을 정당화하고 타자의 실패를 당연시하는 타자 혐오적 매개로 전락한 것 아닌가?
무엇보다도 우리의 존엄과 인권을 위한 객관적 도구이자 자유와 권리의 분배 기준이어야 할 평등이 주관적 권리로 소모되는 가운데, 평등의 내적 모순이 불균형적으로 조정되는 경향이 강화되고 있지는 않은가? 그 결과 ‘동등대우 근거로서의 평등’은 과잉되어 공동체의 다양성·다원화 및 이질성 보존과 소수자의 정체성 인정을 위한 기반인 ‘차등대우 근거로서의 평등’은 과소해지고, ‘형식적·기회적 평등’에 경도되어 ‘실질적·결과적 평등’이 외면받음으로써 근대를 열어젖힌 혁명적 도구였던 평등이 이제는 현대를 재봉건화하는 반동적 도구로 변모되고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봉건·세습 체제의 타파를 위하여 ‘능력에 따른 배분’을 지향한 혁명적 이념으로서 평등에 내포된 가치는 상당 부분 훼손당하고, 이제는 부모 잘 만난 것 또한 능력이라고 하면서 ‘능력에 따라 다른 것은, 다르게 취급받는 것’ 그것이 바로 평등이라고 외치며 ‘배분을 위한 능력’ 그 자체를 옹호·정당화하기 위한 반동적 이념으로 평등이 조롱받고 있는 것 아닌가? 평등 및 차별에 관한 이러한 현실적 우려와 의문들은 과연 예술계의 촉구에 따라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면 정말 해소될 수 있고 그래서 우리는 더 평등하고 차별 없는 세상에서 혐오 없이 더 아름답게 살 수 있다는 것일까?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독촉하기보다는
오히려 예술계가 제정을 촉구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폭력을 독점한 국가에게 포괄적으로 평등을 명령하고 차별을 금지함으로써 그에 상응한 책임과 의무를 포괄적으로 지도록 한 혁명의 산물인 헌법 제11조의 정신을 계승·존중하기는커녕, 주권자인 우리가 거꾸로 감시의 대상인 국가로부터 평등명령과 차별금지를 요구받고 이를 이행·준수해야 할 포괄적 의무자로 전락하는 통로가 되거나 혹은 국가로부터 혐오스러운 존재로 취급받을 계기를 만드는 것은 아닐까? 분명한 것은 차별금지와 평등명령에 내포된 내적 모순과 평등 및 차별에 관한 우리의 인식·현실에 대한 진지한 성찰·통찰 없이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독촉하는 맹목적 태도는, 평등 실현에 나아가기보다는 평등을 조롱하며 현재의 비합리적이고 부조리한 현실을 포괄적으로 고착시키는 데 이바지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차별금지와 평등명령은 ‘비교 대상 간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취급’할 것을 요청하는 당위적 이념이라는 점에서, 현실적으로 발생하는 차별·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핵심 관건은 ‘일정한 사람들에 대한 특정한 취급·대우와 결부해서 해당 사람들을 분별할 수 있는 같고 다름의 기준’을 정립하는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준은 포괄적이고 일반적으로 정립될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다양한 생활영역의 특수성과 구체적 문제상황 속에서 개별적으로 정립될 때 비로소 합리성과 실효성을 담보할 수 있게 된다. 실제로 형벌 부과에 있어서는 범죄의 종류와 범행의 정도가, 미인 선발대회에 있어서는 외모가, 소득세 부과에 있어서는 소득의 정도가, 시험을 통한 승진에 있어서는 시험 성적이, 여학교 입학에 있어서는 여성이라는 성별이, 각각 해당 가치 배분 및 대우를 위한 중요하고 결정적인 기준으로 통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차별 문제를 망라할 수 있는 일반적·포괄적 성격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차별로 인한 피해를 신속하고 실질적으로 구제할 수 있는 실효성까지 확보하려는 의도’로부터 추동된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통해서 구체적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은, 애당초 난망한 일이거나 비합리적이라고 의심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러한 의심은 어떤 사태나 대상을 획일적·통일적으로 다루기보다는 각각의 특수성과 다양성 및 개성을 섬세하게 포착해서 창조적으로 드러내는 데 익숙한 예술계에서 더 두드러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평등 및 차별에 관한 다양한 문제를 망라해서 해결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추동되고 있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이 목소리를 높이면 높일수록, 예술계에서만큼은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에 가담하기보다는 ‘정치·경제·사회·문화·복지·고용·노동·교육·환경·가족 등등과 같은 다채로운 우리들의 생활영역에서 발생하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차별 문제를 각각의 생활영역에 내포된 영역적 특수성과 다양성을 존중·보존하면서 해결하려는 미시적이고 섬세한 오랜 노력과 그 성과들─예컨대 「양성평등기본법」, 「장애인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에 관한 법률」,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등등─을 존중·계승하며 이를 구체적으로 수정·보완 및 확충하려는 시도’에 더 많은 관심과 응원을 보낼 일 아니겠는가?
혐오와 차별 앞에서 예술계를 향한 기대
우리의 문학이 노벨상을 받고 우리의 대중음악에 세계가 열광하는 소위 ‘K-Culture’의 시대를 살아내면서도, 우리가 우리의 예술계로부터 (혐오와 혐오 표현에 대한 규제에 구태의연하게 찬성하는 재미없는 마땅한 소리와 몸짓을 전달받을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에서는 좀처럼 경험하기 어려운 혐오와 혐오 표현에 대한 창발적 형상화나 그에 맞선 예술적 성취를 감상하거나 혹은 (포르노그래피를 연상케 할 만큼 적나라하고 노골적으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거듭 듣기보다는) 평등에 내포된 중첩된 이중의 모순으로부터 야기되는 불협화음을 단련된 솜씨를 통해 잘 조율된 화음으로 청취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여전히 난망한 일인가? 표현의 자유에 기대고 다양성에 터 잡아야 할 예술계만큼은, 표현을 통제·억압하는 데 동참하거나 개별적 특수성을 소외시키는 포괄적인 금지 규범(포괄적 차별금지법)으로 혐오와 차별에 대응하는 자기 파괴적·모순적 행태를 선택할 것이 아니라, 혐오와 차별에도 그동안 갈고닦은 예술로 맞서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출처: 문화정책리뷰(https://culture-policy-review.tistory.com/456)